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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상.. 여백.. 그리고 '내용 없는 아름다움'

[詩가 있는 풍경 21] 김종삼의 '園丁'

 

평과 나무 소독이 있어
모기 새끼가 드물다는 몇 날 후인
어느 날이 되었다.

며칠만에 한번 만이라도 어진
말솜씨였던 그인데
오늘은 몇번째나 나에게 없어서는
안된다는 길을 기어이 가리켜 주고야 마는 것이었다.

아직 이쪽에는 열리지 않는 果樹밭
사이인
수무나무 가시 울타리
긴줄기를 벗어 나
그이가 말한 대로 얼만가를 더 갔다.

구름 덩어리 얕은 언저리
植物이 풍기어 오는 유리 溫室이 있는
언덕 쪽을 향하여 갔다.

안쪽과 周圍라면 아무런
기척이 없고 無邊하였다.

안쪽 흙 바닥에는
떡갈 나무 잎사귀들의 언저리와 뿌롱드 빛깔의 果實들이
평탄하게 가득 차 있었다.

몇 개째를 집어 보아도 놓였던 자리가
썩어 있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것도 집기만 하면 썩어갔다.

거기를 지킨다는 사람이 들어와
내가 하려던 말을 빼앗듯이 말했다.

당신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잔상]

김종삼 시인의 시는 묽은 수채화 같습니다.
사물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고 색채가 강렬하지 않은.., 여백이 많아서 편안한 풍경화 같습니다.
그는 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별 관심 없다는 투'로 툭 던지듯 독자들에게 말을 건냅니다.
그가 시를 쓰는 일종의 방식인데, '원정'은 등단 이전의 초기 작품이지만
시인의 이런 시적 상징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를 그냥 읽어선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길이 없습니다.
과수원은 뭐며, 길은 뭐고, 과실은 또 뭘 의미하는 건지...
그래서 평론가들이 나섰습니다.

'원정'은 과수원(절대순수의 낙원)에서 나(시적 자아)에게 '길'을 가르쳐 준다.
나에게 없어선 안 될 길이기에 '나'는 그 길을 충실히 따라간다.
그곳은 유리 온실이 있는 언덕쪽인데, 사람의 기척이 없는 그곳에서
'나'는 가득 차 있는 과일(수확물, 보상)을 집어 들지만 하나같이 썩거나 벌레가 먹어 있었다.
거기를 지키는 사람은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한다.

김종삼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이 '원정'에서 미리 예견한 셈이 됩니다.
시인의 길을 열심히 가지만, 필경엔 집는 과일마다 썩거나 벌레가 먹게 되는..
그런 예견처럼 김종삼 시인은 직장인 동아방송을 나온 이후 말년을 무척 비참하게 보냅니다.
후배들을 찾아 다니며 술값을 '갈취'하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소주 두병을 훔치기도 합니다.
술에 취해 거리에 쓰러진 행려병자가 되어 시립병원에서 열흘만에 깨어난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년을 더없이 누추하고 힘겹게 보내던 시인은 1984년 12월 8일 쓸쓸하게 이승의 삶을 마감합니다.
평생 끈진긴 채권자처럼 따라다니던 가난과 술에서 비로소 놓여나게 된 것이죠.
다음은 그가 말년에 남긴 '詩作노우트' 라는 시 전문.

 


 담배 붙이고 난 성냥개비불이 꺼지지 않는다. 불어도
흔들어도 꺼지지 않는다. 손가락에서 떨어지지도 않는다.

 새벽이 되어서 꺼졌다.
 이 時刻까지 무엇을 하며 살아왔느냐다 무엇 하나
변변히 한 것도 없다.
 오늘은 찾아가보리라
 死海로 향한
 아담橋를 지나

 거기서 몇 줄의 글을 감지하리라

 遼然한 유카리나무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