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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보헤미안 랩소디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 <195>


       

   에티오피아는 극심한 3년의 가뭄 끝에 대 기근으로 백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1984).  급속한 인구 증가와 산림훼손과 사막화도 큰 몫을 했지만, 국제사회의 원조를 횡령한 공산정부가 재앙을 키웠다.  스탈린 공산정권에도 똑 같은 전례가 있다.
 세계 3대 곡창지대(우크라이나 흑토, 북미 프레리, 남미 팜파스)인 우크라이나에 ‘집단농장’을 세우자 대기근이 발생했는데, 스탈린은 전처럼 계속 식량을 수출하여 결국 250 – 350만 명이 굶어죽었다.  똑같은 잘못으로 ‘인민공사’를 강행한 중국 모택동은, 1960년대에 자연재해까지 겹치자, 대국답게 3년 동안 2 – 4천만 명을 굶겨 죽였다고 한다.  1990년대 후반 김정일의 북한은, ‘고난의 행군’중에 수백만이 굶어죽고, GNP가 $239까지 떨어졌다.  시간이 갈수로 부패하는 ‘절대독재 국가경영’의 경직된 공산체제에서 무엇을 기대할까?  에티오피아 참상이 미디어로 알려지자, 마이클 잭슨은 자신이 쓰고 라이오넬 리치가 공동작곡한 노래 ‘We are the World(우리는 하나)’의 악보를 제작자 퀸시 존스에게 넘긴다.  USA(United Support of Artists) for Africa의 굶주림을 없애자는 운동으로, 45명의 쟁쟁한 가수들이 이 곡을 아플리케처럼 덧붙여 10시간을 녹음했고, 34분짜리 음반에 제인 폰다가 해설을 맡았다(1985. 1. 28).  3월에 출시되자 6백만 장이 팔렸고 이익금 전액은 에티오피아에 보내졌다.  필자도 거금 6만원 바가지를 썼지만 마음은 뿌듯하였다.

 

   사실은 1984년 밥 겔도프의 “Don’t they know it’s Christmas?” 자선공연이 시작이었고, Bob은 ‘85년 7월 초대형 자선콘서트 ‘Live Aid 1985’ 를 기획한다.
 그룹 Queen의 해체위기에서 방황하던 프레디 머큐리는 출연을 결심하고, 식지 않은 인기와 라커답지 않은 4옥타브의 미성과 폭발적 무대매너로, 웸블리구장 최대의 인기몰이(Show Stealer; 엘튼 존)를 한다.  웸블리와 JFK구장에 각 72,000, 10만 관중이 몰렸고, 말 그대로, “The Day the Music Changed the World!”였다.  특히 퀸의  ‘오페라의 밤’ 판에 수록됐던 ‘Bohemian Rhapsody’는 장장 5장(場), 6분에 걸친 드라마요, 판결을 기다리는 살인자의 심리적 흐름을 묘사한 이색적인 Rock이다.
 Galileo Figaro·Beelzebub·Scaramouche·Fandango·Bismilla 같이 이국적, 종교적인 단어가 많다.  프레디는 1946년 아프리카 잔지바르 생으로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다.
 인도국적의 총독부 공무원인 아버지, 가족은 소수 조로아스터 교 신자, 조상들은 페르시안 아랍계로 고향에서 쫓겨나 인도에 정착했다고 한다.  9살에 인도 뭄바이 기숙학교로 보내져 성장기 10년을 외롭게 보낸다.  1964년 잔지바르에 독립기운이 돌고 아랍인·인도인을 규탄하자 영국으로 이주하여, 대학졸업과 함께 시민권을 얻고 이름도 프레데릭 불사라로 개명한다.  무명의 밴드로서 공항수하물노동자로 일하다가 신데렐라처럼 스타로 뜨고, 잇달아 히트곡을 낸다.  유난히 앞니가 튀어나온 용모 콤플렉스와, 종교적 인종적 고립감과 뒤늦게 눈을 뜬 양성애 적 DNA는, 유명해질수록 그를 정서적 방황과 정체성 혼란으로 몰고 갔으리라.  그의 광적인 무대매너와 포효하는 목청, 분방한 45세의 짧은 인생, 모두가 여기에 답이 있지 않을까?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앞서 그는 올림픽 주제곡을 부르고 싶었다.  바르셀로나가 낳은 벨칸토의 여왕 몬세라 카바예와 ‘Barcelona·Golden Boy·How can I go on’ 3 곡을 만들었다(1987).  도밍고·덴버의 두엣도(Perhaps Love, 1981) 좋았지만, 하이 락과 벨칸토의 혼성 두엣은 환상적이었다.  1991년 프레디가 에이즈 컴잉아웃을 하며 이내 사망하여 꿈은 깨어졌지만, 1992년 올림픽에서 몬세라는 혼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그녀 또한 지난 10월 6일 세상을 떠났다.  ‘We are the World’에 이어, ‘Live Aid 1985’와 ‘Barcelona EP’ 세 음반을 모두 사서들은 것은 행운이었다.

 

 

 

 

 

: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전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