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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서 우리는 착하게 싸웠어

[詩가 있는 풍경 37] 정진규 시인의 '우린 착하게 싸웠어'

 

만나지지 않는 것들과의
만남을 위하여
곳곳에서 우리는 착하게 싸웠어
풀잎들은 풀잎들과 싸우고
바람들은 바람들과 싸웠으며
낱말들은 낱말들과 싸웠어
수유리에서 만나 화곡동까지
맨발로 뛰기도 했어
이제 순한 짐승끼리 끼리가 되어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도록 해
한 해가 저물고 있어
허락받은 한 바구니의 과일이 있다면
이웃에게도 조금은 나누어 주는
적은 것의 풍요를
적은 것의 아름다움을
모를 리 없잖아
한 해가 잠기어 가고 있어
돌아가 이제는 입성도 빨아 입어야지
아, 저 사내
어둔밤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등불 하나
그를 위한 따뜻한 식탁도 우리가 마련해야지
모를 리 없잖아.

 

[반성]

다시 연말입니다. 이때쯤이면 꼬물거리듯 살아 온 한 해가 새롭게 보입니다. 그 시점에서 해야 할 일이 지금까지 밀려와 있고, 하지 말아야 했을 후회가 여전히 산처럼 큽니다. 내 시간에 의견을 가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시키는대로' 라지만, 그 것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 채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착하기는 커녕 간신히 악다구니 정도만 피해가며 구불구불 여기까지 밀려왔습니다.

누군들, 그걸 모를 리 있을까요. 그래서 시인은 돌아가 입성이라도 빨아 입을 것을 권합니다. 어둔 밤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등불 하나, 그 쓸쓸한 여정을 보듬을 따뜻한 식탁이라도 준비하라 권합니다. 지나온 시간들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지금쯤엔 정말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정진규 시인은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나팔 서정'이 뽑히면서 등단했습니다. 이후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했고, 10여년간 교직 생활을 이어오다 75년부터는 (주)진로의 홍보 관계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착하게 싸웠어'는 1979년에 펴낸 시인의 네번째 시집 '매달려 있음의 세상'에 들어 있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이 켜 든 '선의의 등불'은 오히려 밝음에의 지향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독자들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난해 79세를 일기로 작고하셨고, 지난 10월엔 현대시학회 주관으로 많은 시인, 독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1주기 추모의 밤 행사가 열렸습니다. 다음은 같은 시집에 들어 있는 '단추 하나의 문제' 전문. 

 

나와 內通하던
열 사람의 女子와도
이 가을엔 헤어지지 위하여
모두 열 개의 誘惑을
오직 한 개의 誘惑으로
集約하기 위하여
나는 하루에 한 번씩
열흘 동안
머리를 깎았지만
그러니까 모두 열 번을 깎았지만
모두 열 번을 버리고 오직 한 번을 얻고자 했지만
단추가 하나
떨어져 있었다.
나의 中央이
다섯 개의 내 秩序가
모두 무너져 보였다.

그것이 問題다.
그것이 問題다.

돌아와 한밤엔
뛰어가는 발자욱 소리들의
맨 마지막
혼자서 뛰어가는 뒤떨어진
발자욱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그것이 나이고자 했지만
나는 혼자서 向方을 바꿀 수가 없었다.

단추가 하나
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