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9 (화)

  • 구름많음동두천 9.0℃
  • 구름많음강릉 10.1℃
  • 구름조금서울 8.4℃
  • 맑음대전 10.1℃
  • 대구 11.0℃
  • 구름많음울산 14.2℃
  • 황사광주 10.1℃
  • 구름조금부산 14.3℃
  • 맑음고창 8.5℃
  • 흐림제주 12.6℃
  • 구름조금강화 8.0℃
  • 구름많음보은 10.4℃
  • 구름조금금산 9.1℃
  • 맑음강진군 11.2℃
  • 구름많음경주시 13.7℃
  • 맑음거제 13.7℃
기상청 제공

'풀 먹고 있는 소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아이'

[詩가 있는 풍경 35] - 정현종 시인의 '어떤 평화'


오후의 山村. 다섯 살쯤 돼 보이는 아이 하나가 앉아서 소가 풀 먹고 새김질 하는 걸 바라보고 있다. 가까이 가는 사람도 못 느끼고 정신없이 보고 있다. 문득 나를 알아차리고 쳐다보며 얼른 「어디 살아요?」 하고 묻는다. 「나는 서울 사는데 너는 여기 사니?」 목소리를 듣자마자 천하를 안심하고 다시 소한테로 눈길을 돌린다. 소 주려고 우리 바깥에 있는 짚을 한움큼 집는데 아이가 좋아하는 얼굴로 「그거 잘 먹어요」 한다. 그 목소리 속에는 친근감과 기쁨이 들어 있다(자기가 하는 짓을 낯선 사람도 하는 데서 느끼는 친근이요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내 마음에 또렷한 그 「풀 먹고 있는 소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사진을 나는 가끔 바라본다. 잊히지 않는 그림. 지지 않는 꽃. 평화여.


[평화]

아이와 소,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것들의 조합입니다. 그걸 바라보며 평화를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맑고 얕은 강물처럼 속을 훤히 드러내 보입니다. 무얼 꾸미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느끼기만 하면 되는, 독자들에겐 마냥 편한 시입니다.

-어느 산촌. 혼자 심심한 아이가 우리에서 풀을 씹는 소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지나던 내가 다가가 함께 쳐다 보니 아이가 문득 '어디 살아요?' 하고 묻는다. 서울 산다고 대답을 했지만, 아이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는 듯 소만 바라본다. 그러다 내가 소에게 주려고 짚을 한웅큼 집어 들자 아이는 비로소 친근감 섞인 목소리로 '그거 잘 먹어요.' 하고 말을 건다. 그날의 이 또렷한 기억은 내 마음 속에 사진이 되어 남았고, 나는 이 평화로운 오후의 풍경을 되새김질 하듯 가끔씩 꺼내 본다.-  

5년전 시인의 '고통의 축제'라는 시를 이 난에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 이 시 '어떤 평화'는 그 때의 '고통의 축제'보다는 어느 면으로 보나 훨씬 평화로운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생과 사의 근원적 문제에 집착했던 시인이 그런 현학적인 시어들을 훌훌 벗어 던지고 마침내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듯 무척 자유로워 보입니다.

정현종 시인은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습니다. 첫 시집 '사물의 꿈' 이후 많은 시집을 냈고, 연암문학상 등 숱한 문학상도 수상했습니다. 서울신문과 중앙일보 기자를 거쳐 연세대 국문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지금도 가끔씩 시 낭독회에 참석한 시인의 근황이 뉴스로 전해지기도 합니다.
아래는 선생의 시집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에 함께 실린 짧은 시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전문.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