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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詩가 있는 풍경 22]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 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 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 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기다림]

기다려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건 일생에 한 번쯤은 가슴을 쿵꽝거리며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열리는 문마다 깜짝 깜짝 눈을 주다가
짧은 순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서야
긴 한숨과 함께 눈길을 거둡니다.
시인의 말마따나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다 종내는 '내가 너에게로' 갑니다.
먼데서 아주 힘들게 오고 있을 너를 앉아서 기다리기가 안스러워
혹은, 다른 급한 볼 일로 늦어지는 너를 마냥 기다리기가 막막해
마음으론 몇번이고 내가 먼저 달려가 부둥켜 안습니다.
부둥켜 안고 비로소 안도의 눈물을 뿌립니다.
기다림이란 이렇듯 가슴 애리는 일입니다.
한번쯤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려 본 사람이라면
열리는 문마다 눈길을 보내는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습니다.

황지우 시인의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실린 '연혁'은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입선작입니다. 산문처럼 길게 이어 쓴 이 작품을 굳이 시라고 불러야 할까 싶기도하지만 읽은 후에는 생각이 달라집니다. 형식이 어떻든 시는 그 나름의 운율과 미학을 갖는데, 연혁이야말로 잘 다듬어진 어떤 시보다 깊은 서정을 숨기고 있습니다.
이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연혁'과 함께 가장 많이 읽힌 시인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아래 시는 그의 네번째 시집 '게 눈 속의 연꽃'(1990년)에 함께 들어 있는 '손을 씻는다' 전문.

 

하루를 나갔다 오면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내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그 자와도
흔쾌하게 악수를 했다
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만졌다
義手를 외투 속에 꽂고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코리아나 호텔 앞
나는 共同正犯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비누로 손을 씻는다
비누가 나를 씻는 것인지
내가 비누를 씻는 것인지
미끌미끌하다